중세의 커뮤니케이션

'구두 커뮤니케이션의 세계' 중세 사람들이 결코 현대인들보다 지적인 면에서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그들은 다른 세계에 살았고, 그 세계는 그들에게 다른 것을 요구했을 뿐이다. 그들은 사실이 없는 세계에서 살았다. 사살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세인들은 자기 자신이나 그들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바로 주변 세계에서 보거나 경험한 일에 관한 정보에만 의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들의 삶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이었으며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들의 삶은 사실이 없는 세계 속의 삶이자 한정된 공간 속의 삶이기도 했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들이 사는 마을 외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정보도 없이 살아갔다. 모든 정보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유언비어가 지배적이었다. 개인적 경험을 제외한 모든 것이 풍문의 소재가 되었다. 당시의 풍문은 오늘날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명성은 허튼 말 한마디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잃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했다. 무지한 사람들은 쉽게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떠도는 소문을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더라도 매우 어려웠다. 중세인들이 사실이라고 한 것은 오늘날의 의견과 같은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 차이를 깨달을 만큼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말을 타고 갔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는 7마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고립된 공동체 내의 동족 결혼이 성행했다. 따라서, 정신박약아가 일정한 비율로 태어났다. 경험이 중시되는 시대에는 나이 많은 사람이 힘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들은 관습이나 관례를 승인하고 법적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재판관이 되었다. 그들은 변화를 거부했고, 모든 일이 연장자가 과거에도 그랬다는 것을 확인하면 그대로 진행되었다. 한 지역 사회에서 사용되는 방언은 50마일 정도 밖으로 나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초서의 이야기에 나오는 대로, 14세기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배가 난파되어 영국 북부 해안으로 밀려갔을 때, 그들은 모두 외국 스파이로 투옥되었다고 한다. 지역 사회 간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빈번한 교류가 없었기에 언어도 지역 단위로 달랐다. 문자를 모르는 지역 사회 주민들에게 교회는 중요한 정보의 제공처였다. 성서는 성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절에 따라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켜 주며, 도덕을 일깨워 주었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된 창문에서 빛나고 있다. 고딕 양식의 교회는 돌과 유리로 된 백과사전으로 불렸다. 교단이나 민간의 소식은 모두 성직자들에게서 나왔다. 수 세기 동안 폐쇄되어 자급자족하던 지역 사회의 구조는 봉건제였다. 귀족과 성직자, 농민 세 계급이 존재했는데, 귀족은 모두를 위해 싸웠으며, 농민은 모두를 위해 일했고, 성직자는 모두를 위해 기도했다. 매우 드문 경우지만, 외부에서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면 마을 내에 큰 소리가 전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을은 사람이 소리치면 들릴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도시의 행정 분할도 이러한 규모로 이루어졌다. 마을의 법과 관습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생생한 기억이 궁극적인 판단 기준이 되었다. 양피지에 기록된 문자보다 살아 있는 증인이 더 신뢰받는다는 것은 법적 통념이 되었다. 이는 도시의 재판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필사본은 드물었다. 필사본은 결국 죽은 동물의 가죽에 남긴, 그 의미를 의심받는 표기에 지나지 않았다. 문맹자들에게 있어 문서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증거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증인은 계속 살아가야 할 사람이기에 진실을 말했다. 재판의 진행도 말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관행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판 당사자들도 구도로 호출되었으며, 호출하면서 종을 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고소의 내용이 피고에게 큰 소리로 낭독되었다. 중세 말기까지 재판 당사자들은 스스로 진술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농아나 맹인을 위한 재판은 거의 없었다. 법정은 증언을 청취했다. 유죄나 무죄냐 하는 것이 논쟁의 대상이었다. 달력도 시계도 없고 아무런 기록도 없었기에, 시간의 경과는 기억할 만한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마을에서 그것은 도요새가 날아다닐 때나 추수기에 등과 같이 계절적인 활동으로 확인되었다. 농촌 사람들은 해가 바뀌는 것은 잘 알았다. 물시계나 해시계를 갖출 만큼 부유한 마을에서도 파수꾼이 지켜보고 있다가 교회의 첨탑에서 시간의 경과를 큰 소리로 알려 주곤 했다. 그 소리를 듣고는 들에 나와 일하던 농부들이 다시 큰 소리로 전달해 주었다. 한 시간보다 작은 단위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사실 자연에 보조를 맞추어 사는 세계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춘분이 해마다 다른 때였으므로 한 달의 경과는 대략 알 수밖에 없었다. 부활절은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는 근원이 되었는데, 그것은 부활절이 태양과 달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달라지며, 때로는 이 결합이 달이 뜨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혹한이나 대흉작, 죽음 등과 같이 삶의 중요한 사건들은 보다 신뢰할 만한 표식으로 기억되었다. 성인 축일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위대한 에라스뮈스조차 자신이 성 주스의 축일에 태어났는지 아니면 성 시몬의 축일에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처럼 시간적인 표식은 생일을 정하거나 상속 문제를 결정하는 데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에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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