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토와 설형 문자

'수메르의 도시 국가' 이집트에서는 시간을 재는 능력과 나일강의 범람을 예측하는 능력이 권력의 근간이 되었다. 남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유역 에는 관개 시설을 갖추고 있어 조직적인 통제를 할 수 있었으므로 범람 시기를 예측하는 능력에 대한 요구가 그다지 절실하지 않았다. 수메르는 소규모 도시 국가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각 도시에 있는 사원의 성직자 가운데 우두머리가 직접 신의 대변자가 되었다. 도시의 수호신은 왕이었으며, 총독의 지위와 권력을 부여받은 차지 농민 tenant farmer 이 백성을 지배했다. 문자를 만든 것은 수메르인들이라는 주장이 있다. 수메르인들이 셈을 하고 목록을 만들기 위해, 다시 말해 산수의 영장으로서 문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최초의 점토판에는 여러 건의 정식 계약과 판매 실적, 토지 양도 등이 포함되어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명부나 상품 목록, 기록, 사원이나 소도시 국가의 회계 장부는 수호신이 자본가나 지주, 은행의 역할도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수입이 늘어나면서 복잡한 회계 처리가 필요했으며 주변인들이나 인계자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기록할 필요성도 생겨났다. 사원의 관리 사무소는 영속적인 회사처럼 되어 갔다. 사원의 조직이 확대되고 토지 소유가 늘어나면서 자원도 축적되었고, 따라서 그 기능을 분화할 필요성도 생겨났다. 부의 증대와 전문화는 경쟁과 갈등을 가져왔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에서 발견되는 충적 점토는 벽돌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필기도구로도 사용되었다. 현대에 발견되는 여러 기록은 수메르인과 그 이후 문명의 주요 특징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쓰인 재료의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편견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편견은 그 문명의 두드러진 점을 보여 준다. 필기를 위한 준비로 구운 점토를 잘 반죽하여 도기나 판으로 만들었다. 젖은 점토가 필요했고 또 점토판은 금방 말라 버리기 때문에 빠르고 정확하게 쓰는 게 중요했다. 돌 위에도 쉽게 새겨지는 선형 문자의 뒤를 이어 거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갈대를 가지고 가느다란 선으로 그린 상형 문자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직선을 그리려면 점토가 바스러지는 경향이 있으며, 원통형의 갈대 펜은 판에 수직으로 혹은 비스듬히 눌러쓰게 된다. 크기는 작은 연필만 하며 축은 사각이고 끝이 비스듬하며 날이 삼각인 필기도구가 나온 것은 기원전 3000년대 후반 무렵이다. 그것을 날카로운 면에 대고 끝을 깊게 눌러 주면 쐐기나 설형 문자가 나타나게 되는데, 만일 이 필기도구를 가볍게 눌러쓰면 하나의 기호를 표기하는 데에도 여러 번 손이 가야 했다. 노력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획수를 줄여야 했고, 상형 문자 형식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매개체로서 점토는 상형 문자보다 도식화된 형식으로의 변화를 요구했다. "그림과 언어의 간격이 메워졌다." 설형 문자는 삼각형과 많은 평행선이 그 특징이다. 서로 다른 크기와 두께를 지닌 쐐기들 집합이 복잡해지고 점토판 규격이 더 커져서 글을 쓰는 사람의 손에 잡히는 각도가 달라짐으로써 규격화되는 경향이 더욱 촉진되었다. 각도가 변화한다는 것은 획과 쐐기의 방향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상형 문자에서 기호로의 변화를 촉진했다. 상형 문자의 규격화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호에서 시작되었으며, 획을 쐐기로 바꿈으로써 급진전했다. 관련된 종교나 역사적 텍스트를 기록하는 데 상형 문자는 점차 부적합했고 음절을 나타내는 여러 기호가 채택되었다. 기원전 2900년에는 필사 형식과 기호 사용이 훨씬 더 발전되었다. 기원전 2825년에는 필사의 방향과 문장 속에서 단어를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방법이 확립되었다. 기호들은 커다란 판의 한 구역에 정렬되었다. 필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문자열은 수평으로, 행은 아래로 흘러갔다.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젖은 점토판 위에 원통형을 굴렸으며, 돌로 만든 원통형의 도장이 도입되었다. 다양한 디자인의 이 도장들은 개인의 상징이 되었으며, 대다수가 읽고 쓸 줄 모르는 공동체 속에서 소유권의 표시로 사용되었다. 도장은 목에 걸로 다니면서 재산이나 소유권에 관한 계약에 사용되었다. 구체적인 상형 문자에는 여러 항목에 걸친 정교한 어휘가 존재했다. 처음의 의미가 변화된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애초의 그림에 손질을 가하였다. 2000개 정도의 기호가 사용되었다. 기원전 2900년경 대부분 단음절 어휘들의 음절 기호가 도입되면서 기호의 숫자는 약 600개 정도로 줄었다. 이 기호들 가운데 약 100개가 모음이다. 그러나 단일 자음을 나타내는 기호나 알파벳을 만들려는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형 문자는 부분적으로는 음절 문자이며 부분적으로는 표의 문자, 혹은 한 단어를 나타내는 문자이다. 많은 기호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수메르인들은 성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대체로 수나 인칭, 시제의 구분도 생략하였다. 하나의 단어나 음절에 하나의 생각을 충분히 담기는 어려웠다. 상형 문자와 표의 문자는 추상적인 음가를 지니고 있으며, 필사의 연구는 언어의 연구와 연계되기 시작했다. 햇빛에 말린 점토판은 쉽게 변질하였다. 이 약점은 불에 굽는 것으로 극복되었다. 이처럼 쉽게 파괴되지 않는 성질은 상업적, 개인적 통신의 불가침성을 보증하였다.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게 개조되었지만 점토는 무거운 재료였기 때문에 넓은 지역에 걸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일반적 특성 때문에 널리 흩어져 있는 사회의 영구적인 기록을 수집하는 데 적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