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기억술, 읽기와 쓰기

'에드 헤레니움'에 의하면 강한 이미지가 최선이다. 자료가 눈에 잘 띄기 위해서는 그런 이미지와 연관되는지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재미있거나 피비린내 나거나 요란하거나 화려하거나 혹은 비정상적인 이미지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이미지들이 기억의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각 이미지가 자료의 여러 구성 요소를 기억하는 계기가 된다. 기억해야 할 개별 요소는 자료의 종류에 따라 이미지화되어야 했다. 법에 관한 자료를 기억하려면 극적인 장면이 적합할 것이다. 기억의 극장을 배회하면서 관련된 지점에 오면 그 지점과 관련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라야 하는 것이다. 축적된 이미지들은 한 단어와 연관될 수도, 몇 개의 단어 혹은 하나의 명제와 연관될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는 의성어나 의태어도 매우 유용하다.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종교적인 내용을 기억하는 데 이미지를 활용하는 극장 기억법을 각별히 추천하였다. 그는 "모든 지식은 감각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각의 도움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12,13세기에 그리스와 아랍 문명의 과학적, 일반적 지식이 유입되면서 학자나 지식인들에게 이 기억법은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 회화와 조각이 교회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기억법이 적용되었다. 교회의 이미지가 기억술의 촉매가 되었다. 파두아의 원형 교회 내부에 있는 지오토의 1306년작 그림에는 전체 이미지들이 마치 기억 극장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군데군데 서 있는 한 사람 또는 집단은 각기 성경의 한 이야기를 묘사하는 매개가 되고 있으며, 새로이 발전된 미술적 환상의 심층 심리를 이용하여 보다 기억하기 쉽게 되어 있다. 각 이미지들은 30피트 정도의 간격으로 떨어져 있으며, 모두 최대한 단순하고 명료한 형태로 주의 깊게 그려졌다. 그 교회는 구원으로 가는 기억술의 통로이다. 플로렌스에 있는 마리아 노벨라의 프레스코 벽화에는 7가지 학예와 7가지 미덕, 7가지 죄악이 순서대로 묘사되어 있다. 4가지 기본적 미덕의 그림에는 기억의 단서들이 추가로 제시되고 있다. 신중함을 표상하는 사람 그림에는 원이 그려져 있다. 그 원에는 미덕의 8가지 요소가 쓰여있다. 이미지와 윤곽, 그리고 문자의 사용을 종합함으로써, 하나의 벽화에서 전체 지식 체계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기억술은 점차 증대되는 대학인들에 의해서도 이용되었다. 모든 강의는 교수가 교재를 읽어 나가면서 설명과 논평을 추가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지침은 대부분 시험에 대비한 기억술 목록이나 약어 사용법의 형태가 많았다. '중세의 읽기와 쓰기' 필사본이 익숙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에게 읽기와 쓰기는 서로 다른 것이었다. 귀족 집안에는 읽을 줄 아는 노예가 한 명 이상, 그리고 쓸 줄 아는 노예가 따로 있었다. 편지를 수신인이 직접 읽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이 노예들이 읽었다. 또한, 읽어 주는 노예가 쓰기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쓰기는 문자의 모양만 아는 것으로는 부족한 별개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회계 감사라는 말이 원래 듣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도 회계 보고서를 관계자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읽어 주는 것을 듣던 관행에서 비롯되었다. 베리 성 에드문의 수도원장 샘슨은 1주일에 한 번씩 회계 보고를 들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읽을 수 있었지만 언제나 누군가가 편지를 큰 소리로 읽게 시켰다. 이러한 관행 때문에 편지에는 "이 내용은 비밀이므로 다른 사람의 면전에서 읽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들어가게 되었다. 실제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성 아우구스틴은 5세기에 성 암브로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놀라운 일이다. 그가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의 눈은 페이지를 따라 흘러갔으며, 그의 마음은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면서도 그의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쓰기가 학교에서 수사학의 한 분야로 간주한 것이다. 쓰기란 결국 큰 소리로 읽히는 것을 의미했다. 초기의 특허장이나 토지 증서도 마치 증여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끝내는 것처럼 안녕을 의미하는 valete라는 단어로 끝맺는 경우들이 많았다. 오늘날에도 유언장은 여전히 큰 소리로 읽는 관행이 남아 있다. 이러한 관습 때문에 읽기와 쓰기가 구분되었다. 읽기는 음성을 사용하고, 쓰기는 눈과 손을 사용했다. 그러나 쓰기도 소리 없는 작업이 아니었다. 새로운 지식도 많이 유입되고 경제도 전반적으로 발전했던 13세기에 들어서면서 필사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었다. 수도원들은 일부 회랑의 벽을 칸막이하여, 작게는 2피트 9인치 정도의 폭밖에 안 되는 작은 방들을 만들어서 필사를 전업으로 하는 수도승들의 작업장으로 사용하였다. 캐럴이라 불린 이 방들은 대게 정원이나 회랑 쪽으로 창이 나 있어서 날씨가 나쁜 때에는 기름종이나 골풀 거적, 혹은 유리나 판자 따위를 세워서 그 공간을 막아야 했다. 영국에는 베리 성 에드문드, 이브샴, 애빙던, 캔터베리의 성 아우 구스틴, 그리고 더럼에 캐럴이 있다. 더럼에는 북쪽 벽으로 11개의 창이 있으며, 각 창에는 세 개씩의 캐럴이 붙어 있다. 수도승들은 필사하면서 혼자서 중얼거려야 했다. 그 말은 찬 공기와 둥근 천장 속에서 울려 퍼졌다. 필사는 힘겨울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다. 각 수도승은 자기가 쓸 짐승 가죽을 준비해야 했다. 송아지 가죽이 최상품이었다. 먼저 가죽을 속독과 솔로 문질러서 연하게 만든 후 크레용으로 부드럽게 만들어서 네 번 접어 필사인 앞에 수직으로 세워진 책상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