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정보 전달 체계

정보 전달이 대체로 부정확했다는 사실은 중세의 삶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주었다. 여행은 그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이 되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여행이란 길을 따라 마을을 지나는 잠깐만 안전하고 나머지 숲 속을 지나야 하는 긴 시간은 위험하고 두려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의 유럽 대부분을 차지했던 숲 속에 강도나 짐승이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여행자가 자신의 목적지가 어딘지를 거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도 없고 길도 없었다. 여행자들은 태양이나 별의 위치, 새들의 움직임, 물의 흐름, 지형상 특성 등을 잘 살피면서 방향 감각을 유지해야 했다. 그 길을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서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하더라도, 계절이 다르거나 상황이 달라지면 거의 쓸모가 없었다. 강의 흐름은 바뀌고 여울은 깊어졌으며 다리는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명이 함께 떠나는 것이었다. 중세에는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혼자 여행하는 경우는 대개 왕의 명을 받고, 긴 메시지를 그대로 암송하도록 훈련받은 사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메시지는 위조되거나 분실될 수 없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로마 교황청과 영국 및 아라곤 왕실, 베네치아 공화국, 그리고 파리의 대학에 정기적으로 정보를 전해 주는 사신이 있었다고 한다. 울름이나 레겐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독일 남부의 세 광산 도시에는 정기 우편 서비스가 있었다. 부르고뉴의 상인 자크 코에르는 비둘기 서신을 이용하였다. 메디치의 은행가들은 그들의 지점 및 전 유럽 40여 곳에 있는 대리인들과 사자를 이용하여 정기적인 접촉을 유지하였다. 이 사자들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빨랐다. 보통 사람들은 말이 지쳐도 말을 바꿀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이들은 새 말로 바꾸어 하루에 보통 사람의 배가 넘는 평균 90마일을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뉴스가 도시에 전달되어 그 의미가 퇴색될 때가 많았다. 15세기에는 잔 다르크의 죽음이 콘스탄티노플까지 전해지는 데 18개월이 걸렸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몰락 소식이 베니스에 전해지는 데는 한 달이 걸렸으며, 로마까지는 두 달, 그리고 나머지 유럽 지역에 전달되는 데는 석 달이 걸렸다. 후에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하여 신대륙에 상륙했다는 뉴스가 포르투갈의 거리에 전달된 시간과 폴란드의 뉴스가 전해지는 시간이 거의 같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항해한 거리가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거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 주민들이나 세대는 대부분의 뉴스를 떠돌이 광대나 소규모 악대 아니면 방랑 시인이나 음유 시인들로부터 들었다. 이들은 오늘날의 연기자 혹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속임수나 마술, 동물 묘기뿐 아니라 서커스까지도 포함되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실제 사건 가지고 쓴 시나 노래로 공연하는 형태를 취했다. 청중들은 그 이야기를 단지 한 번 듣기 때문에 그 공연은 연극적이고 반복적이며 쉽게 기억되어야 했다. 청중들의 편의를 위해 그 지방 방언으로 다시 쓰인 경우도 많았다. 감정 묘사는 단순하고 과장되었다. 모든 공연은 연기자와 청중이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운을 맞추었다. 연기자는 목소리와 제스처를 알맞게 바꾸어 가면서 모든 내용을 소화했다. 재미있는 동작을 취할수록 많은 돈이 모였다. 하나의 시가 특별히 성공을 거두면 다른 음유 시인들도 이 시를 외워서 공연하기도 했다. 방랑 시인은 특정 내용을 널리 선전하기 위한 후원자에 의해 고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시를 풍자시라 불렀다. 겉으로는 낭만적인 내용인 것 같으면서도 정치적이거나 개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드물게는 실명을 사용하여 풍자한 경우도 있었다. 1285년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스페인의 필립 3세를 풍자시로 공격했다. 13세기에 이러한 선전물 작가로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길로메 드 베르쥬댕이었다. 충성심이 가장 강력한 연대 조건이었던 구두의 세계에서 명성이 중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에 유언비어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방랑 시인들은 서로 자주 만나서 레퍼토리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이 모임은 프위라 불렸는데, 프랑스 전역에서 열렸으며, 여러 시인이 나와 자신의 놀라운 기억력을 과시하는 경연 형태를 띠었다. 이들은 수백 행에 이르는 시를 단지 세 번 듣고 외울 수 있어야 훌륭한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당시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대학 교수들은 학생들이 큰 소리로 읽어주는 100 행정도의 내용을 한 번 듣고 외워야 했었다.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뛰어난 기억력을 요구했다. 기억을 도와주는 유용한 수단인 운율이 당시 문학에서 그토록 지배적이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14세기까지만 해도 법적인 문서를 제외한 거의 모든 문서가 운율에 따라 기록되었다. 프랑스의 상인들은 상업 활동에 필요한 수의 법칙을 137개의 대구로 구성된 시로 만들어 읊조리곤 했다. 필기 재료에는 아무래도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상인뿐 아니라 학자들에게도 기억력 훈련은 필수적이었다. 일상적으로 요구되는 기억력 외에 보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중세의 지식인들은 고대 그리스 말기에 만들어진 학습용 보조 수단을 이용하였다. 이를 사용한 것은 학자들로 국한되었다. 학자들은 이것을 인문학의 7과목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다. 기억법은 수사학의 한 부분으로 교육되었다. '애드 헤레니움'이라 불린 교재는 중세 기억술의 주요 참고 도서로 남아 있다. 이 책은 '기억의 극장'을 사용하여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기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기억해야 할 자료를 낯익은 장소로 간주한다. 예컨대, 어떤 건물의 전부 혹은 아치문, 현관홀, 구석 등과 같이 일부가 될 수도 있다. 그 장소는 또한 일정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내부는 서로 쉽게 구별되는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 그 건물이 너무 크다면 정확히 기억하기가 어려워진다. 기억의 극장을 준비했다면, 그 건물을 거닐면서 기억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