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헌법 제1조와 언론 자유의 신화

'수정 헌법 제1조의 탄생 과정' 미연방 수정 헌법 제1조는 가히 혁명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200여 년 동안 그것은 특정인 이견을 표현할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자유도 참된 자유가 아니라고 믿던 많은 사람을 심판대에 오르게 했다. 미국에서 발표된 공식 정책 가운데서도 자유로운 표현에 대한 이러한 선언만큼 전 세계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은 것도 없었다. 그 선언은 2세기 동안에 걸쳐 발발한 수많은 변혁 운동에 불길을 붙여 왔다. 45개의 단어로 된 짤막한 이 선언을 기초했던 이들은 자유로운 표현권을 주장한 그 내용 속에 새로운 것은 그 선언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고 자유로운 표현권에 대해 아주 폭넓은 세계적 찬사가 쏟아졌으며, 또한 매우 다양한 해석이 가해졌다는 점이다. 수정 헌법 제1조에 포함된 언론 관계 규정은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한 조문은 주로 제임스 매디슨에 의해 다듬어진 것이다. 그는 여러 주에서 내놓은 시안들을 권리 장전에 포함 시키 위해 그것을 사전에 분석하는 일을 맡았다. 1787년의 헌법 기초에 참여했던 이들은 그것이 의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는, 영국 권리 장전의 주요 부분뿐 아니라 18세기의 사상적 전통을 실정법 속에서 존중하는 하나의 형식적인 장전을 지지하는 것이 마땅히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언론에 관한 매디슨의 원래 초안은 자신의 버지니아주 헌법을 따랐다. 매디슨이 기초한 연방 권리 장전의 세 번째 조항은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으며, 그 네 번째 조항은 다음과 같다. "국민들은 그들의 감정을 말하고 쓰며 출판할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제한받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자유의 가장 위대한 보루 가운데 하나인 언론의 자유가 침해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매디슨의 초안을 놓고 며칠 후, 그는 여러 주에 제시하기 위한 12개의 수정안을 준비했으며, 이들 수정안은 모두 의회를 거쳐 각 주로 보내졌다. 그 결과, 의회에서의 비례 대표제 정족수를 규정한 첫 번째 조항과 중간 선거를 거치지 않고서는 의원들이 자신들의 세비를 인상할 수 없게 한 두 번째 조항은 승인받지 못했다. 이에 비해 종교의 자유와 언론, 출판의 자유 및 불만 사항의 시정을 위한 평화적 결사권을 하나의 조항 속에 묶어서 인정하고 있던 세 번째 조항은 승인을 얻어 그것이 결과적으로 제1조가 되었다. 후세의 일부 법학자들은 이 조항이 장전의 10개 수정안 가운데 제일 첫 번째에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조항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지금 볼 때 첫 번째에 있는 것이지 매디슨의 초안에서는 원래 세 번째에 있던 것이다. 당시 매디슨은 식민지 13개 주 사이에 여러 '파당'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었는데, 이 점을 고려하여 그는 서로 갈등하는 파당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언론 매체를 이용하게 되면 어느 쪽도 독단적 세력으로 부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매디슨은 "페더럴리스트 10"에 실린 자신의 유명한 에세이에서 파당에의 맹목적 집착이 초래할 위험성에 대해 누누이 경고한 바 있다. 영국 권리 장전의 기초자들이나 다수결 원칙을 지지한 17~18세기 사상가들처럼 그는 상대적으로 다수의 입장에 있는 파당이 다분히 월권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크게 유의하였다. 매디슨은 그 에세이에서 '공동의 열정이나 이익'이 곧 다수파의 그것으로 간주하는 곳에서는 다수파의 월권을 견제할 어떠한 방책도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계속 지속되지 못하고 오히려 광포화되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방만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해결책은 다수의 파당이 존재하는 다원 사회에 있다고 보았다. 바로 그러한 다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언론으로서, 신문이나 작은 책자 및 광고 포스터 등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체였다. "보다 영역을 넓혀라. 그러면 매우 다양한 정당과 이익 집단이 생겨날 것이며, 다수파 사람들이 다른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동일한 동기를 갖게 될 가능성을 훨씬 줄어들 것이다. 또한, 그런 공통된 동시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느끼는 모든 이들이 그들의 힘을 깨닫고 일제히 함께 행동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언론 자유, 그 이론과 실제의 괴리' 민주주의에 대한 가정에 있어서 언론이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매디슨만큼 강력히 주장한 미국인은 드물었다고 하겠다. 권리 장전이 채택된 지 7년이 지난 뒤 당시 존 애덤스 대통령은 프랑스와의 전쟁 위협이 고조되자 정부 비방자 처벌법에 대한 의회의 승인을 구하려고 했다. 그 법은 정치 지도층 인사를 비난한 글을 쓴 언론인을 구속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매디슨은 무절제한 언론이 추구하곤 했던 지나친 비판과 선정주의적 경향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부 비방자 처벌법에 대응,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유명한 발언을 했다. "다소 지나치다는 것과 매사에 적절하다는 것은 그렇게 엄밀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경우는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욱 그렇다. 다소 해로운 가지들이 있더라도 그냥 생장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그것을 완전히 잘라 버림으로써 적절한 과실을 얻으려는 이들의 열정에 손상을 입히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미국적 관행이다. 오류와 억압을 물리치고 얻은 세상의 모든 승리는 바로 언론이 다소 지나치다고 여겨지더라도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얻은 결과이며, 또 미국이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되어 정치 체제가 미국 국민의 행복에 기여하게끔 빛을 발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복된 토대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바로 그와 같은 지혜로운 정책에 대해 결코 의구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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