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언론 체계의 기본 모순

'식민지 미국에서의 언론 자유사상' 밀턴으로부터 홈스에 이르는 시기는 바로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가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신념 체계에 더욱 깊숙이 연관되어 가던 시기에 해당한다. 홈스가 자유 시장의 원리나 시장의 비유를 '미국의 헌법 이론'이라는 묘사한 것은 상당이 적절한 표현이다. 미국의 건국 유공자들은 자칭 계몽주의자들이었다. 즉, 진리의 힘에 대한 밀턴의 신념뿐 아니라 사악한 허위를 극복할 수 있는 이성에 대한 밀턴의 확신에 공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표현과 관련된 여러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그러한 사상이 보편화되기까지는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미국 권리 장전의 기본 개념들을 형성시킨 모체이자 최초의 인권 규정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권리 장전은 단지 의회 의원들의 자유로운 표현권을 보장한 것이지, 결코 일반 시민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권리 장전은 "의회 의원의 선거는 자유로워야 한다. 의사 진행상의 발언 및 토론의 자유는 법정이나 의회 밖에서의 어떠한 장소에서도 비난당하거나 문제시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물론 이는 구두 또는 서면상의 자유로운 표현권이 그러한 권리를 현명하게 행사할 수 있는 특권층에게만 부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건국 유공자들은 식민지 상황이라는 상이한 환경은 물론, 계몽주의 철학자들 베이컨과 데카르트 그리고 여타 경험주의적인 과학적 조사 방법을 강조하는 이들은 물론, 인간사에서의 이성의 우월성과 정치적 결정에서의 다수결의 중요성을 강조한 로크, 몽테스키외 등의 사상가들에 의해 피력된 여러 사상과 조화를 이루어 냄으로써 영국의 권리 장전이 지닌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만일 선이 악의 도전을 받아 필연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경우에, 그러한 선은 다수파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공감되고 인식된다는 것이다. 사실 다수결의 원리란 밀턴의 자가 수정의 원리를 국민 차원에까지 확장한 것이다. 국민들은 단지 자유로운 언론을 통해서만 진리나 올바른 생각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건국 유공자들이 자유 언론을 지지한 사실은 매우 당연하다고 하겠다. '젱거 사건과 언론 자유' 사실 식민지 상황에서 자유 언론을 찬양한 것은 권리 장전이 있기 훨씬 전부터였다. 1735년 독일에서 이민해 온 인쇄업자 존 페터 젱거의 유명한 소송 사건에서 필라델피아 변호사 앤드루 해밀턴은 미국의 인쇄업자들이 집권층의 전횡에 대한 정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식민지 사회를 위한 중요한 목표일 뿐 아니라 '자유를 위한 최선의 명분'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총독을 비난하는 정보를 유포한 혐의로 정부 비방죄로 기소된 젱거를 석방하기 위해 해밀턴은 배심원들에게 호소하는 자리에서 마지막 결론을 내렸는데, 그러한 그의 항변은 여러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다음은 당시 해밀턴이 배심원들에게 한 말이다. 그 결과 젱거는 무죄 판결받았으며, 그 사건은 간행물에 게재된 논평의 진실성이 비방죄에 대항하는 적절한 변호로 받아들여진 문헌상의 최초의 소송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젱거의 경우는 하나의 예외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다른 많은 이들은 거의 반세기 이상 계속해서 그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을 쓰려고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그런데도 이미 싹을 틔우는 씨앗은 뿌려졌고 인쇄물을 통해 자유로운 표현을 고취하는 운동은 미국적인 경험의 일부가 되었다. 사실 그러한 선동은 세계의 모든 곳에서 아직도 여전히 맺음 되지 않은 상태다. 물론 해밀턴이 "진리를 말하고 기술함으로써 독재적인 권력을 폭로하고 반대할 수 있는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확장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밀턴의 입장에서 볼 때, 허위를 전파하는 것으로 판단된 구교도들을 검열했던 것처럼, 해밀턴이 말한 바로 그러한 권리가 당연히 용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나, 해밀턴 자신의 주장은 그것이 자기편이 아닌 '다른 편'에 적용되는 때에는 그러한 권리를 제한시켰다. 애국심이나 외국인을 혐오하는 경향은 오늘날에도 잔존해 있지만, 언론 자유를 외치던 초창기에 그러한 것은 하나의 지배적인 풍조를 이루고 있었다. 완전히 자유로운 언론은 어디에서도 결코 구현된 적이 없었다. 젱거의 소송 사건은 오랫동안 널리 거론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인쇄물을 통한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가 미국에서 공공의 쟁점이 되었던 것은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서방 세계에서 활자가 발달하면서 의견을 인쇄해 출발할 수 있는 수단이 널리 확산함으로써 새로운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 충동도 마찬가지로 널리 번져 나가게 되었다. 쟁거의 글이 출판되기 15년 전에 이미 보스턴에서 발행되고 있던 < 뉴 잉글랜드 쿠란트>는 매우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즉, 논란거리가 되는 쟁점들 비록 그것이 권력층에 있는 사람과 관련이 있는 경우에도 인쇄해 출판하기 시작했다. 는 매사추세츠에서 위세를 떨치던 캘빈 신정주의에 대해 당시 반대 입장에 있던 지도적 인물들에 의해 1721년 창간되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맏형인 제임스 프랭클린을 위시한 이들 반신정주의자들은 인크리스 마더와 코든 마더 및 그들 형제의 천연두 예방 접종 계획에 대해 과감히 반기를 들고 나섰다. 당시 벤자민은 형 밑에서 일을 거들어 주고 있었다. 제임스의 동료인 존 체클리와 윌리엄 더글러스는 '뉴 잉글랜드 쿠란트'를 통해 식민지 보스턴의 지배 권력층으로부터 탄압받을 정도로 마더 형제와 그들의 계획을 맹렬히 비난하였고, 끝내 그들의 신문은 강제 폐간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 신문은 처음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 가정을 실행하는 것과 관련된 언론의 공공연한 비판적 역할을 정당화하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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