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의 전제 조건들

17세기 초에 유럽의 상당수 지역에는 우편으로, 인쇄소 및 지역 유통망과 같은 기본적인 네트워크가 확립되어 있었다. 17세기에 종교 전쟁이 발발하면서 뉴스에 대한 수요는 절정에 이르렀다. 1620년 최초의 영문 코란토가 네덜란드로부터 북해를 건너 배달되었을 당시, 코란토의 첫머리기사는 조직화한 신문을 필요로 했고, 또 가능케 했던 사회적인 관습과 제도를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보헤미아 접경 지역의 소식이라고 하면서 누렘 베르크에서 전해 온 서한들에 의하면 프라하 근방에서 왕과 바이어렌 공작이 이끄는 군대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양측 모두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바이어렌 공작에게 포로로 잡힌 프라하 사람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유럽의 광대한 지역 간에 날마다 소식이 교류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며, 더구나 뉴스 필자와 독자들 사이에서도 정기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 건의 뉴스라도 확립된 연결망에 따라 전달되는 것이 분명했으며, 또한 그것도 편집인이 기다리고 있던 통신원의 송고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짜임새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합적 조직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인쇄업자인 피터 반 덴 키예르가 이러한 내용의 코란토를 발행하기 20년 전만 하더라도 그러한 복합적인 서비스 조직의 가능성은 없었다. 17세기 초에 와서 유럽 사회의 민간 조직에서, 그리고 운송과 커뮤니케이션 수단, 인쇄 산업, 외교 및 행정 업무의 구조와 처리 면에서 변화가 일어나면서 뉴스의 정기적인 발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 이면에는 가족 구조, 인구 형태, 그리고 시민의식 면에서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으며, 이 변화로 인해 뉴스의 공급이 가치 있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6세기말에 유럽 서반부 지역에서는 결혼을 통해 한 가정을 이루는 관습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결혼은 곧 새로운 가정을 구성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젊은 남성이라면 모두 자신들이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를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600년경에는 유럽의 대다수 큰 도시에 소매 상점이 등장하였다. 이들 소매 상점은 대개 개인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이 만든 제품을 직접 판매하는 수공업자가 아니라 물건을 사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판매했다. 그 당시 암스테르담이나 파리, 런던의 인구는 각각 25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으며, 런던의 인구는 1700년에 가서는 두 배로 증가하였다. 이들 도시는 모든 활동의 중심지로서, 이곳에서는 무역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기 위해서, 또는 용병으로 싸우러 오거나 피난 온 사람들, 그리고 여러 다른 사회에서 온 여행객과 이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도시의 시민들 사이에서는 공공의 일에 대한 인식이 싹터서 이에 대한 지적이고 도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외국에서 일어난 일, 이를테면 무역의 가능성과 관계있는 중요한 일들, 왕조의 흥망, 군대의 징집과 해산에 관련된 일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최초로 정기 간행물을 발행한 사람이 '고안했던' 것은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 내용을 계속해서 게재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최초로 뉴스 책자로 발간한 서적상 토머스 아처의 생각은 "마치 용병을 모집하듯이 뉴스를 소집하여, 사건들을 한 곳에 모은다는 것이었다." 뉴스를 모아 1주일에 한 번씩 뉴스 책자를 발간한다는 매력적인 새 상품으로 유럽의 여러 시장을 개척하고 있던 독일의 인쇄업자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음으로써, 아처는 그 당시 런던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흥밋거리와 걱정거리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정기 신문의 시대'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지던 출판이 정기적인 출판으로 전환된 것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불과 수년 동안에 매우 급속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미 운문으로 된 뉴스 연보를 발간한 적이 있던 새뮤얼 딜바움은 1597년에 콘스탄츠 호수 주변에 있는 로르샤흐에 사는 한 인쇄업자와 함께 매호마다 제호가 서로 다른 뉴스 시트를 다달이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609년 슈트라스부르크의 서적 판매상 요한 카롤루스는 '주목할 만한 사건들을 가려 뽑은 소식'을 다달이 발행했다. 한편 볼펜뷔펠에서는 인쇄업자 줄리우스 아돌프 폰 쇠 네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다. 안트워프의 인쇄업자 아브라함 베어외벤은 1605년에 '노이에 티딩헤'를 발행하였다. 이것은 처음에는 비정기적으로 이따금 발행되었으나, 그 후 발행 빈도를 높여서 1617년에 주간으로 나왔고, 1620년대에 와서는 주 3회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페어외벤이 스페인 왕이 섭정을 맡고 있던 앨버트와 이사벨라 대공으로부터 받아 낸 특권의 내용은, "우리가 쟁취하거나 쟁취할 예정인 승진 소식이라든지, 도시 점령에 관한 최근의 모든 뉴스를 모아서 목판이나 금속에 인쇄하여 우리가 지배하고 있는 모든 지역에서 팔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형식 면에서 프랑스 '오카지오넬'의 영향을 받아 판화와 지도를 넣어 가면서 매우 화려하게 제작되었다. 1610년부터는 '노이에 티딩해'의 프랑스어판이 나왔다. 또한, 1610년 스위스 바슬에서는 주변 도시에서 오는 뉴스를 주로 취급하는 주간 신문이 발행되자, 이를 모방한 것들이 여러 개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들 간행물은 새롭고도 중요한 명칭인 '오르디나리 차이퉁'으로 불린 것으로, 이후 반세기 동안 도시를 중심으로 발간된 수십여 개의 신문들도 이러한 이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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