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초기 신문 현상

초기 뉴스 간행물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지역적으로 작은 범위가 아니라 광대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유럽 사회에 있어서 뉴스 간행물은, 글을 읽을 줄 아는 개개인의 시민들에게 그들 스스로는 구경할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던 공적인 사건들의 세계에 관한 모습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사회를 전체 대륙의, 그리고 세계의 큰 맥락 속에 위치하여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동양은 20세기 전야까지도 이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6년 서양 세계를 오랫동안 여행하고 귀국해서 일본에 있는 동포들에게 신문의 기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신문이란 "집 안에 들어앉아서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지 않아도, 그리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그곳에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없어도 세계를 독자들에게 연결해 준다"는 것이다. 일본과 중국은 사실상 유럽과 같은 시기에 일종의 신문을 개발하기 시작했지만, 그 뒤 유럽에서 신문에 관한 아이디어를 다시 주입해 줄 때까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극동의 정보 체계는 상이한 종류의 것이어서, 공공 세계의 지식을 일반 독자들에게 제공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중국 문명은 거대한 대륙을 종횡으로 가로질러 체계적인 뉴스 수집 망을 구성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문명 가운데 하나이다. 한대에 왕실은 우역망을 통해 제국 내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정보를 전달받게 되어 있었다. 이는 중세 유럽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 우편 국장들이 그들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개요를 기록해서 정해진 경로를 통해 전달하던 군주 통신 제도와 비슷한 것이었다. 당나라 때 중국인들은 '저보'라고 하는 필사된 공식 간행물 혹은 관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저보'는 통신 루트를 통해서 수집된 정보를 당시 사회의 통치 집단들에게 유포시켜 주던 것이었다. 황제의 조정 내부에는 '조보'  또는 '국문초' 라고 하는 특수 형태의 '저보'가 나오고 있었다. '저보'의 후기 발전 단계인 송나라 때는 순수한 지식인 집단 사이에 보급하기 위한 '저보'가 제작되었으며, 명나라 때에는 사회의 보다 광범위한 계층에서 읽혀지게 되었다. 청나라 시대에는 '청보'라고 알려진 인쇄된 형식의 공식적인 뉴스를 만들어 배포하는 사설 뉴스 조직이 등장하였다. '청보'의 형태로 마지막까지 발행된 것은 1928년 10월까지 남경에서 발행되었던였다. 중국에서는 1500년 이전에 이미 유럽에서와 같은 형태의 신문을 발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선결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의 발달은 매우 늦어지고 있었다. 유럽에서 렐라치온이나 코란토가 최초로 등장하기 훨씬 전에 중국에서는 이미 잉크라는지 종이, 인쇄술, 활자, 금속 활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뉴스를 공개적으로 인쇄하여 정기적으로 배포하기까지에 이른 것은 19세기에 유럽의 상인과 선교사들이 중국 본토에서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외국어로 된 신문을 발행하면서부터였다. 중국과 달리 일본의 사회 및 정치 체제는 통치 계급 내에서조차 뉴스가 체계적으로 유통되는 것을 권장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외국에 관한 뉴스는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17세기에 네덜란드인이 인쇄기를 일본에 도입하긴 했지만 고도로 발전된 뉴스 발행 기술을 소개할 수는 없었다. 1616년에 와서야 새로운 무인 정권, 즉 막부가 들어서고 도시들을 중심으로 준 부르주아 계층이 새로 성장해 가면서 소설의 보급이 촉진되었으며, 사회적 뉴스를 위한 시장이 형성되어 갔다. 또한, 17세기 초부터는 왕실에 관한 가십과 사회적인 스캔들을 부정기적으로 발간하는 조직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한 장으로 발간된 황실의 가십거리는 '요미우리' 혹은 '카와라반'으로 일컬어졌으며, 이것은 기와장이나 석판에 글자를 새겨 잉크를 칠한 다음, 종이에 컬러로 인쇄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든 인쇄물은 보기에 목판 인쇄물과 매우 흡사했다. 이 카와라반은 일본에서 인력거라고 하는 교통 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상인들이 주된 상업 활동 외에 부업 삼아서 제작한 것이었다. 인력거꾼들은 도로를 왕래하면서 많은 사람과 접촉하기 때문에 정보를 얻어 내기에는 가장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신문에 글을 쓴 것은 전문성을 띤 문필가 집단이었으며, 당국의 검열을 받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18세기말에는 곳곳에서 쌀 폭동이 매우 빈번하게 발생하였으며, 석판 인쇄로 제작된 운문의 풍자 비평이 널리 배포되어, 막부에서는 활자화된 것이 갖는 반란의 잠재력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문화적인 인쇄물은 모두 당국의 검열을 거쳐 발행되었으며, 일본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뉴스를 조직적으로 정기 배포한 것은 19세기말에 서구의 영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신문의 발달이 얼핏 보면 하나의 예외적인 형상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법칙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즉, 신문은 인쇄술에 의존하는 매체로서 전 세계의 모든 사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가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인쇄술은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조건에서 등장하였으며, 다른 사회에는 그와 흡사한 조건들이 충족되고 나서야 도입되었다. 신문이란 것이 어느 사회에서나 자연 발생적으로 등장했던 것은 아니다. 무역과 경제 활동의 필요에 따라 신문은 파급되어 갔던 것이다. 신문의 발행을 원치 않았던 정부도 많았다. 이들은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것이 발행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발행되었다.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정보 회로는 점점 더 이처럼 기술적으로 간단하게 제작되는 신문에 의존하게 되었고, 신문은 정치, 경제 활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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