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신문의 단계적 발전

일반적으로 신문은 발행 간격이 짧고 규칙적일 것과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을 것이 기대된다. 신문이 이러한 특성을 획득하기까지 뉴스의 발행은 네 단계를 거쳐 왔다. 제1 단계는 대부분의 유럽의 언어에서 relation 혹은 relacioum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개별적인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서, 사건이 발생한 뒤 너무나도 오래 지난 뒤에 발행되어서 때로는 그저 그 사건이 일어났던 해의 연대만을 밝힐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1619년에 나다니엘 뉴베리란 사람이 발행한 '네덜란드로부터의 뉴스 : 죄수 바니 벨트 일당이 적과 내통하여 꾸민 조국에 대한 음모 들 수 있다. 표지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이 팸플릿의 전체 제목은 이 사건의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요약해 주고 있다. 제2 단계는 일련의 이야기를 묶어서 코란토의 형태로 발행하였다. 영국에서 이러한 유형의 선구자이며, 대표적인 인물은 토머스 아처, 니콜라스 분, 나다니엘 버터였다. 이들은 1620년에서 1625년 사이에 그러한 간행물을 여러 종류 출판하였다. 1625년에 성청 법원은 모든 외국 뉴스의 간행을 금지했다. 그러나 분과 버터가 외국에서 들어오는 뉴스의 인쇄에 관한 공식적인 독점권을 얻게 되자, 이들은 1638년에 완전히 합법적인 기반 위세서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코란토는 아직도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정기 간행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1주일에 한 번씩 발행되고 있었으나, 스스로 제 목소리를 가지고 독자들에게 얘기하는 한 주체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제호들은 제공된 정보와 관련된 나라의 이름들을 나열할 뿐이었다. 1622년 5월 30일에 나온 한 코란토는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 보헤미아, 팔라틴, 프랑스, 그리고 저지대 국가들에서 들어온 주간 뉴스"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제1면 표지의 제호는 주마다 바뀌었다. '지난주의 연속 밝히면서 시작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코란토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온 세상의 얘기를 전해 주려고 시도하였으며, 세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포괄적이며 정기적으로 알게 된다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가장 많은 코란토를 발행하였으며, 그것을 많은 나라에 여러 가지 언어로 보급했다. 진화의 3단계는 보통 '다이어널'이라고 알려진 형태이다. 이는 날마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1주일 동안의 기사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로버트 콜즈와 새뮤얼 페크는 영국에서 이러한 형태를 이용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지면은 대부분 영국 의회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한동안 30년 전쟁이 유럽의 대부분의 뉴스 간행물에 주된 내용을 제공해 주다가, 1640년대에 오면서 영국이 점차 시민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자 사람들의 관심도 영국의 국내 문제로 옮아갔다. 이때 수많은 '다이어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 대부분은 기사화된 사건들이 일어난 첫 날짜와 마지막 날짜를 부기하면서 '의회의 경과에 관한 완벽한 다이어널'이라고 일컬었다. '다이어널'의 발행 빈도는 하루하루 일어나는 사건의 시간적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제4 단계, 즉 마지막 단계는 책의 형태로 된 다른 뉴스 간행물과 마찬가지로 표지가 있고 발행 명세 표시가 기록된 '머큐리'이다. '머큐리'라는 말은 이전에도 1580년대 후반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라틴어 간행물 '메르쿠리우스 갈로 벨기쿠스'의 제호에 계속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중부 유럽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을 연재 형식으로 제공해 주는 것으로, 유럽 대륙의 대박람회장들이 주된 보급 장소였지만 그 일부는 멀리 영국에까지 들어왔다. 시인 존 돈은 그의 풍자 시에서 '메르쿠리우스 갈로 벨기쿠스'지에 대한 불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대들은 도둑질하기는 머큐리 같으나, 거짓말하는 것은 그리스 사람 같다." 영국의 시민전쟁 기간에 '머큐리'는 어찌나 신속하고 풍부하게 간행되었던지 많은 사람의 손에 의해 런던에서는 일요일을 포함, 1주일 내내 어느 날이나 사거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간행물에 붙인 제호는 상징적이었다. 머큐리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기사를 쓰는 전달자였으며, 그로 인해서 얻게 되는 돈이나 정치적인 반대급부를 위해 독자들을 잡아끌어 매어 두려고 시도했던 저널리스트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형태를 취하고서도 기본적인 발상의 바탕에는 뉴스 책자의 한 부분씩을 계속 발행한다는 데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나 검열과 같은 불운으로 간행물의 존재가 아예 사라질 때까지 주마다 간행되던 페이지에는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그 무렵 머큐리와 함께 발달하던 것이 '인텔리전서'였다. 이는 그 당시의 다른 간행물보다 보다 공식적이고 관변 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시민전쟁이 제2 단계(1648)에 접어든 때에 '킹덤스 위클리 인텔리젠서'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유형의 간행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의심할 여지없이 크롬웰 정부의 국무장관 존 털로우의 감독 아래, 당대 가장 유명한 머큐리스트로 알려진 마차몬트 네담을 초빙하여 발행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지역 내의 주요 사건을 보도하는 공공 정보지였다. '인텔리전서'가 등장함으로써 뉴스 정기 간행물을 폭넓고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새로운 정보나 오락에 대한 요구가 있고 그를 충족시켜 줄 소재가 있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룰 용의를 보여 주었다. 17세기에는 유럽과 북미에서도 신문을 위한 기술적, 행정적 기반이 확립되었으며, 18세기에는 날마다 간행되고 다양한 내용을 싣는 완전한 형태의 신문을 만드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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