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의 기원

'근대 신문의 맹아' 자연계에 먹이 사슬이 존재하듯이, 모든 사회에는 수없이 많은 정보의 사슬이 존재한다. 이 정보의 사슬을 통해 여러 가지 형태의 지식이 관습적으로, 혹은 계획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중세 말 이래 서양에서는 신문이라는 인쇄물이 이처럼 돌고 도는 정보의 회로를 이어 주는 주요 연결 고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문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에서 수집한 대량의 정보를 끊임없이 늘어 가는 독자들을 위해서 제공해 왔다. 초기의 신문은 외교적, 경제적, 군사적 정보를 전달하는 급사와 역사가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도하기 위해 신문이 고른 정보와 신문이 취해서 재구성하는 많은 정보 출처에는 최근의 것이나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독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발행되어 제공되었다. 신문은 무엇으로든지 지면을 메워야만 했다. 보다 더 분명하고 보다 더 확실한 정보 혹은 보다 더 광범위한 시각이 축적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신문은 독자들의 다양한 관심을 끊임없이 끌어야 하고, 신문의 계속된 진전을 위해서는 기술 혁신이 제공하는 모든 효율성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루살이로 발전해 갔다. 이 글은 우리가 신문이라고 일컫는 대상이 지구상의 도처에서 태동해 온 과정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신문'이라는 용어는 신문의 실제적인 형상에 비해 훨씬 뒤에 나온 산물이다. 영국에서는 뉴스가 거의 100년 동안이나 책의 형태로 간행된 뒤에야 비로소 역사책의 한 특수 부문이 아니라 '보고 버리는' 물건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독일에서 차이퉁이라는 근대 용어는 1850년경까지도 신문을 가리키는 일반 용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차이퉁이라 말은 알림, 전갈, 전함, 소식 또는 신기한 얘기 등을 의미할 뿐이었다. 처음에 이 말은 1500년 이후부터 개별 사건들의 얘깃거리를 모아 나타나기 시작한 다양한 간행물의 부제로서 사용된 '새로운 소식 용어의 한 부분으로만 쓰였을 뿐이다. 또한, 독일에서는 '프레세'라는 말은 1500년 이래 인쇄물보다도 인쇄기를 지칭했지만, 점차 그 뜻이 한정되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일간 신문과 정기 간행물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어느 언어권에서나 신문을 뜻하는 근대적인 용어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그 이전에 사용했던 초기의 용어들은 모두 다 뉴스가 수집되고 산출되는 수단으로부터 유래되었거나 혹은 제공되는 뉴스의 종류에서 유래된 말들이었다. 어떤 간행물은 '애드버타이저' 혹은 독일어로 '안 차이거'라고 불렸다. 물론 그러한 간행물도 정치적, 사회적인 정보를 싣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주된 기능은 광고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코란토'라는 말은 17세기 유럽 여러 나라에서 절차가 조금씩 다르고 언어학적으로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일정 기간에 일어난 일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뉴스거리들을 함께 수록한 간행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8세기 중엽에 드니 디드로는 '주르날'에 대한 정의를 "예술과 과학에서의 최근 발견에 관한 상세한 내용과 신간 서적의 발췌 내용을 싣고 있는 정기 간행물"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한편 1756년의 볼테르의 글을 보면 '가제트'라는 용어가 "공공 문제에 관한 진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말들의 의미가 상당히 달라졌다. 1777년에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장기간 발행된 일간 신문이 문화 정보뿐만 아니라 정치 정보도 실으면서 스스로 "쥬르날"이라 칭하였다. 더욱 복잡한 예로는 1688년부터 1792년까지 네덜란드 사람이 프랑스어로 발행한 '가제트'가 '누보 쥬르날 위니베르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15세기 후반에 인쇄술이 최초로 발전하면서부터 뉴스가 될 만한 하나의 사건에 관한 얘기가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1540년에 빈에서 한스 징그리너가 "노비테텐'의 발행을 위한 정부의 특혜를 얻었으나, 그 내용은 실제로 관청의 공고나 마찬가지였다. 폴란드에서는 일찍이 1513년에 '리투아니아로부터 온 러시아 소식'이 발행되었다. 파리에서는 1488년부터 1529년 사이에 정부 관련 정보의 공식 발표문을 담은 인쇄 전단인 '오카지오넬'이 드문드문 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200년 동안이나 발행되었던 이 '오카지오넬'에 이어 '카나르'로 알려진, 보다 논쟁적이고 보다 대중적으로 만들어진 인쇄 전단이 쏟아져 나왔다. 16세기말 독일에서는 많은 인쇄업자가 정치 뉴스와 그 밖의 뉴스를 실은 전단과 소책자를 불규칙적으로 발행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쾰른으로 이주해 온 미하엘 폰 아이칭은 1588년에서 1593년 사이에 교회 문제, 정치 문제에 관한 일련의 보도를 간행하였고, 또한 6개월의 간격을 두고 최근에 일어난 사건의 요약을 '역사 보고'란 일반 제호로 인쇄하여 마인강변의 프랑크푸르트시에서 1년에 두 차례 개최되는 대박람회 때 판매하였다. 1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요약, 종합한 연감을 만들려는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다. 1611년에 나오기 시작한 '메르쿠르 프랑소아'는 관보적인 기사와 반관보적인 기사들을 요약해 주었고, 그 밖에도 지난해에 나온 '카나르'에서 많은 기사를 자유롭게 빌려 왔으며 홍수와 천재지변, 돌림병이나 거인의 출현, 또는 혜성이나 이상한 징조 등에 관한 센세이셔널한 기사를 실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런 출판물들과 신문의 현상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은 신문에 있어서는 독자와 인쇄업자, 정보 제공자 사이에 지속적인 관계가 확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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