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인쇄의 의미

'책, 차례, 그리고 상표' 인쇄술이 어느 정도 정착된 후에는 책을 이전과 같이 발음을 적어 둔 것으로 보지 않고, 과학적이거나 허구적인 혹은 다른 정보를 담은 일종의 물건으로 보기 시작했다. 필사본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서로 달랐지만, 같은 판으로 인쇄된 책은 모두 동일한 물건이었다. 이제는 인쇄에 의해서 어떤 작품의 두 책은 단순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를 대상으로 복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상표의 사용을 가져왔다. 인쇄된 책은 글자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글자로 된 상표, 즉 표지를 사용하게 되었다. 동시에 기호를 사용하려는 경향도 아직 강하게 남아 있었다. 1660년대까지 우화적 그림이나 비언어적 디자인이 사용된 고도의 상징물들이 표지에 새겨졌다. '인쇄의 의미' 윌리엄 M.아이빈스는 수 세기 동안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한 인쇄술들이 있었지만, 인쇄가 체계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1400년대 중반 이동식 활자가 개발되고 난 후라고 주장한다. 아이빈스는 손으로 그린 전문적인 그림은 필사본에 담기면 곧 졸렬한 것이 되어 버린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아무리 숙련된 화가라 하더라도 자신이 모사하려는 그림과 관련된 분야의 전문가 조언 없이는 그림의 요점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클로버를 잘 모르는 화가들이 클로버를 그릴 경우 마치 아스파라거스처럼 되기에 십상이다. 인쇄한다는 것은 수백 년 동안 장식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인쇄는 이러한 필사 문화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었다. 활판 인쇄가 발명되기 훨씬 전에도 목판에 클로버를 정교하게 새기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필요로 했던 것, 즉 '정확하게 반복되는 시각적 말'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필사는 손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못했다. 반면 인쇄는 사전에 준비된 모체에서 똑같은 것을 반복 생산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목적과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인쇄기는 활자로 조판을 하는 것과 같이 손쉽게 '정확하게 반복되는 시각적 말'을 인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반복되는 시각적 말이 새로이 만들어 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근대 과학이다. 정확한 관찰이 근대 과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수렵인이나 여러 분야의 장인들도 오랫동안 생존을 위해서는 정확한 관찰력이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 왔다. 근대 과학의 두드러진 차별성은 정확한 관찰과 정확한 표현을 접합시켰다는, 즉 복잡한 대상이나 과정을 세밀히 관찰하여 정확한 언어로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주의 깊게 만들어진 전문적인 인쇄는 그와 같이 정확한 언어로 묘사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전문적인 인쇄와 전문 용어의 사용은 상호 보완 작용하면서 개선되었다. 그 결과로 생겨난 초 시각화된 지적 세계는 새로운 세계였다. 고대와 중세의 작가들은 정확한 언어로 묘사할 줄 몰랐을 뿐이다. 이는 인쇄 이후에 생겨나서 낭만주의의 시대, 즉 산업 혁명 시대에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구두 표현이나 구두의 잔재가 남아있는 표현에서는 사물이나 광경, 혹은 사람의 시각적 외양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 아니라 행동에 집중했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에 관한 논문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수사학에서 추구하는 정확성은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이젠슈타인도 어떤 사물의 정확한 외양을 묘사하는 그림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볼 수 있었던 과거의 문화를 오늘날 상상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시사 한 바 있다. 정확하게 반복되는 시각적 말과 이에 상응하는, 물리적 현실의 정확한 언어적 묘사에 의해 열린 새로운 지적 세계는 과학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낭만주의 이전에는 어떠한 산문에도 제럴드 맨리 홉킨스의 작품에 나오는 것 같은 상세한 풍경 묘사가 없다. 낭만주의 이전에 어떠한 운문에도 홉킨스가 '인버스네이드'에서 힘차게 흘러가는 실개천을 묘사한 것처럼 자연 현상에 면밀하고 세부적이며 객관적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윈의 진화론이나 마이클슨의 물리학뿐만 아니라 이러한 종류의 시도 인쇄의 세계에서 파생한 것이다. '활자의 공간' 어떠한 의미가 조판되어 시각적 공간으로 넘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인쇄는 단어가 전체 글 속에서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가를 통제할 뿐만 아니라 모든 페이지에서 그 단어의 위치와 단어 상호 간의 공간적 관계까지를 통제하기 때문에, 인쇄된 지면의 빈 곳 자체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바로 근대 및 포스트모던 세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구디에 의하면, 필사 목록과 도표도 단어를 특정한 공간적 관계 속에 위치 짓는다. 그러나 그 공간적 관계가 매우 복잡한 경우에는 그것이 계속 다른 필사인들에 의해 필사되는 과정에서 그 복잡함을 결국 없어져 버리고 만다. 인쇄는 무한히 복잡한 목록이나 도표도 얼마든지 정확하게 복제해 낼 수 있다. 인쇄 시대의 초기에 학문적 주제를 다루는 경우에는 극도로 복잡한 도표들이 사용되곤 하였다. 활자가 만들어 내는 공간은 과학적, 철학적 상상력뿐만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위해서도 작용한다. 그 공간이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방식은 복잡한 양상을 보여 준다. 조지 허버트는 자신의 시 '부활제의 날개 '제단'에서 공간을 활용해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행의 길이를 다양하게 하여 시 전체가 각기 날개와 제단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필사에서는 이러한 시각적 구조는 극히 제한적으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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