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커뮤니케이션 발전의 사회적 조건들

이와 같은 기억술과 풍문, 환상의 세계에 사실적인 정보와 그 근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상인들이 가장 먼저 불어넣었다. 그들은 수 세기 동안 부목에 회계를 기록해 가면서 여기저기를 여행하였다. 부목을 뜻하는 tally라는 단어는 자른다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자국들이 새겨지는 이 부목은 중세 말까지 영국 왕실의 재무성을 포함하여 모든 회계인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국제 은행의 계좌를 가지고 여러 나라의 화폐로 복잡한 거래를 해야 했던 15세기 초 상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정보에의 접근 필요성에 대한 요구는 점차 늘어나는 대학인들이나 문법 학교나 교회 학교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 학교들의 학생들은 졸업 후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점차 늘었다. 유럽의 왕과 왕자들도 봉건제가 해체되고 징세를 기본으로 하는 중앙 집중화된 군주제가 형성되면서 관료 기구를 확대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14세기 이후 유럽 전역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이루어지는 국제 거래도 아라비아 수학을 이용해야 할 필요성을 더 크게 했다. 이 아라비아 수학은 이전 시대의 로마 숫자나 낡은 주판을 이용하는 것보다 기록하기가 훨씬 쉬웠다. 그러나 문자 해독의 필요성을 가장 크게 자극한 것은 갑자기 종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는 8세기경 사라르칸트를 침략했던 아라비아족의 눈에 띄었다. 포로가 된 중국인 기술자들을 사마르칸트로 보내 제지 공장을 세웠다. 14세기가 되면 수력을 이용하여 값싸고 질긴 종이를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14세기말 볼로냐에서는 종잇값이 400% 인하되었다. 종이가 양피지보다 훨씬 싸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이를 쓰는 것에 대해서 반대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양피지는 1000년을 간다. 종이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갈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제지 공장이 늘어나면서 종교 개혁의 정신도 퍼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성직 매매를 비롯한 여러 부패상 때문에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중세 말 공동생활 형제 회에 의해 종교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보다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로 기독교 신앙을 설교하였다. 그들의 개혁 운동은 에라스뮈스 같은 저명인사를 포함하여 당시 많은 학자를 매료시켰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학교와 각종 교육 기관들은 문자 해독 능력을 갖춘 성직자를 상당수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속속 필기 공방에 고용되었다. 당시 필기 공방은 유럽 대륙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상인들과 정부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많고 급성장하는 직업이었던 법률 가와 공증인들의 문서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플로렌스에 있는 필사 공방이 가장 유명했다. 이 공방은 '서적상 새로운 직종에 종사하는 비스티치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이 서적상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종이를 판매하던 사람들이 정착하여 상설 가게를 차리면서 나타난 직종이었다. 비스티치는 한때 50명에 달하는 필사인을 고용하기도 했다. 고용된 필사인 들은 각자 집에서 작업해서 실적에 따라 임금을 받았다. 비스티치는 새로운 책을 입수하면 그 목록을 번역가에게 보낸 다음 승낙을 받으면 책을 보내 번역하도록 하였으며, 완성된 저작을 열성적인 필사인들로 하여금 필사하게 하였다. 종이 가격이 계속 내려가고 안경이 발전하면서 문자 해독 능력에 대한 요구는 더욱 강화되었다. 안경이 처음 발명된 것은 14세기 초였지만 100년 뒤에는 널리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안경을 사용함으로써 필사인이나 독자 모두 작업 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 책에 대한 요구는 더욱 증대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을 몹시 괴롭혔던 골치 아픈 문제는 필사인들이 너무 드물어 필사업 운영이 힘들 정도였으며, 그 결과로 그들의 임금이 천문학적으로 높았다는 점이다. 즉, 경제적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1450년대에야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구 문명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사건은 귀금속이 많이 나는 남부 독일의 광산 지대에서 벌어졌다. 그 지역에서 대규모 은 광맥이 발견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권세 있는 가문이었던 푸거가는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인 아우크스부르크를 본거지로 거대한 금융 제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인접 도시인 레겐스부르크, 울름, 누렘베르크는 오랫동안 유럽 금속 가공업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들은 또한 천문학 및 항해 용구 제조의 중심지이기도 했고, 금속 조각 기술을 최초로 개발한 곳이며, 유럽 최고의 시계 기술자들 가운데 일부가 이 지역 출신이었다. 숙련된 보석 세공인과 금 세공사들은 의식용 갑옷에 귀금속을 박아 넣었으며, 줄로 작동되는 복잡한 장난감도 만들어 냈다. 이 지역은 연질 금속을 가공하는 데 매우 뛰어난 기술자들이 많은 곳이었다. 금 세공사의 품질 보증 마크가 연질 금속 주형에 글자 모양을 새겨 넣고 이를 찍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낸 것도 아마 이 금속 기술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주형에 주석과 안티몬의 합금을 녹여 붓고 식히면 활자체가 만들어졌다. 이것을 인쇄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인쇄기 자체는 수 세기 동안 사용되어 온 아마 압축기를 변형한 것이었다. 즉, 잉크가 묻은 글자체의 지형 위로 종이를 밀어 넣을 수 있게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이 기술은 잉크가 잘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에 양피지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이 공정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 바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이다. 그의 새 인쇄기는 구두 커뮤니케이션 사회를 무너뜨렸다. 인쇄는 서구의 지정사에서 가장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 영향은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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